이 책은 아주 가족같이 지내는 친척동생으로부터 추천받은 책이다.
2주 전부터 일주일에 한 권씩 읽고 매주마다 한 번씩 만나서 독서모임을 갖고 있다.
그 책이 바로 이 미술관 옆 인문학이라는 책이다.
어떻게 이 책을 추천을 받고 읽게 되었냐면 오랜만에 동생에게 연락이 왔었다. 내가 결혼하고 나니까 와이프 눈치
보인다고 연락을 잘 안 하더라ㅋㅋ
전화를 받고 이야기하다 보니 김미경 reboot책 저번에 형 집에서 봤었다며 빌려달라고 했다.
그다음 날 카페에서 책을 빌미로 3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다.
인문학, 철학, 예술, 인간 미래에 대하여 등등 아주 뜨거웠다.
2번째의 북미팅이 끝난 지금 다음 주는 나를 바꿀 자유를 읽기로 했고 난 지금 이 책의 마무리를 지어보려 한다.
차례는 1부부터 6부까지 있는데 각 부마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미술 예술 작품에 대한 해석을 해놓았다.
살아가다 보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독서나 간접 경험만으로는 알기 힘든, 인생이 가르쳐 주는 인식이란 게 있다.
나이테가 켜켜이 쌓여야 '아 이게 그런 의미였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 경우 말이다.
같은 문학작품이라 하더라도 나이에 다라 다르게 다가온다.
미술이나 음악도 세월과 함께 쌓인 삶의 지혜가 녹아들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새로운 감동을 전해 줄 때가 종종 있다.
문학이든 미술이든 예술은 그만큼 인생의 무게와 함께 자라나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각 부 마다 내가 고찰했던 곳을 몇 개씩 부분적으로 적어보았다.
1부 자유를 향한 여정
규격화된 삶을 거부하는 집시 -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 / 헉슬리 <멋진 신세계>
위험이 항상 겪을 수 있는 일상으로 여겨질 때 공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위험과 불안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디에도 구속되고 조종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다.
<규격화, 표준화된 현대인의 삶>
규격화와 표준화는 산업사회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산업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있다.
고정된 틀에 얽매인 삶은 인간이 농업을 중심으로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오직 머무는 삶을 추구하면서부터 규격화 표준화가 하나의 규범처럼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고인물은 썩는다. 이 말은 평범한 진리가 아니라 비상한 진리다. 이미 현대인은 퇴화하기 시작했다.
자유로부터 스스로 도피하고 있다.
이제 일신우일신, 즉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날마다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날마다 떠나야 한다.
머무는 삶이 아니라 떠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직장을 버리자거나 노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통념과 관성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끊임없이 혁신하는 정신적인 유목민과 집시를 의미한다.
날마다 새로워지고자 할 때 우리의 삶은 무기력에서 활력으로, 필연에서 자유로, 노예에서 주인으로 거듭날 것이다.
우상 파괴의 선구자 돈키호테 - 세르반테스-
우리가 전통 풍자극인 마당극을 볼 때 광대가 이성적으로 기존 사회를 분석하고
비판해서 우상 파괴의 통쾌함을 경험하는가?
오히려 광대의 우스꽝스러운 말과 충동적인 행동을 통해 역설적으로 시대의 모순을 발견하지 않던가?
밤, 자유의 공간 <몽마르트르 거리 - 밤> _ 카미유 피사로
개인의 자유는 고독을 먹고 자란다. 사회의 통념이나 부당한 강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고독한 성찰의 시간을 전제로 한다.
먼저 자신의 욕망과 내면에 솔직해지는 것에서 자유의 싹은 자란다.
고독하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고 자유롭기 때문에 고독하다.
이제 낮의 대용품을 걷어내고 밤의 고독을 즐기자. 밤의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자.
적어도 밤에는 내 안에 있는 타인을 쫓아 보내고 내 안에 나를 가득 채우자.
고독이란 무엇인가? 고독을 어떻게 활용할까? 던져본다
2부 동양과 서양의 시선
서양 회화 속의 서구적인 사고방식은 동양에 대한 이해와 맞물리면서 서양을 주체나 정상으로,
동양을 대상이나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인식과 태도인 오리엔탈리즘적 요소가 가득하다.
풍설야귀인도 _ 최북
십 년을 살면서 초가삼간 지어 냈으니
나 한 간, 달 한 간, 맑은 바람 한 간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곳이 없으니 이대로 둘러 두고 보리라. -송순-
서구적인 자연지배 사상에 대한 성찰
인간을 주체로, 자연을 대상으로 분리하는 서구적인 자연관이 과연 인간을 행복의 길도 인도하고 있는가?
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이 정말 우리에게 이로운가? 아니면
과학기술로 인해 환경오염이 더 심각해지는가?
죽음을 통해 진정한 철학적 성찰을 강조한 카뮈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 이게 바로 자살, 즉 죽음에 대한 사고다.
철학은 그렇게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밖에 모르는 삶을 잠시 멈추고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되돌아볼 때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고민은 기계적인 반복 행위만이 있는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생각하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아주 작은 출발일 수 있지만 자기 인생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이 진정으로 소중하고 이러한 사고의 끈을 부여잡고 깊이 파고들어 가야 한다는 얘기이다.
손에 빈 공간이 있어야 모래를 쥘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빈 공간은 단순히 비어 있는 게 아니다.
가득 찰 준비를 하고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비어 있을 때 채울 수 있다. 스스로 부끄러울 수 있을 때 당당할 수 있다.
스스로 초라해질 수 있을 때 새로운 도약도 가능하다.
세한도 -김정희-
여백의 미 강조
시련을 넘어서는데 어떤 접근 태도와 방식이 더 우선이고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둘 중에 어느 하나를 배타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문제도 아니다.
다만 분석적인 판단력보다는 반성적인 성찰이 내적인 견고함을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데 더 깊이 있는 뿌리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만약 서구적인 이성이 과학적인 사고 방법이라는 도구적인 성격을 넘어 그 내부에 성찰적인 요소를 회복한다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3부 이성의 그늘
이성과 과학이 신앙이 되어 버린 시대
서구의 근대적인 이성관을 정립한 데카르트 <성찰>
데카르트는 감각에 기초한 사고가 인간을 진리로 인도할 리가 없기 대문에 감각적인 사고, 감성적인 사고를 배제하고 철저히 이성적인 사고에 기초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감각이 배제된, 철저히 이성적인 사고란 무엇일까? --------------수학-----------
대수학이나 기하학처럼 "자연 안에 있든 없든 간에 구애됨이 없이 매우 단순하고 매우 일반적인 것들만을 취급하는"
학문만이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함.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데카르트가 주장한 것이 맞냐 아니냐 보다 어떻게 활용할까?이지 않을까 싶다.
이성에 대한 맹신에서는 벗어나는 태도가 필요한 때이지 않을까 싶다.
인간과 로봇의 관계와 경계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인간 역시 유전자의 확대 재생산을 위한 운반 기계에 불과하다고 할 때, 인간과 로봇의 사고 능력, 기억 능력이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을 가져 보기
인간이란 무엇인가?
접근 방식을 바꾸기
로봇의 능력이 어디까지가 한계이냐의 문제가 아닌 인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되돌아보기
파놉티콘 사회
<죄수들의 보행> --고흐--
거대한 감옥으로 변한 현대사회 -푸코의 <감시와 처벌>
현대 사회에서 가정, 학교, 군대, 병원 , 공장 등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소속되어 살아가는 공간들이 사실상 감시와 처벌의 기구다.
그러한 의미에서 근대사회와 현대사회는 감금 사회, 관리 사회, 처벌 사회, 감시사회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한마디로 현대사회 전체가 여러 개의 감옥으로 이루어진 사회라는 의미이다.
무언가 관리와 감시의 눈길에 주눅 들어 위축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점 던지기
서양 철학의 주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4부 빈곤의 역사를 넘어
예술 작품은 종종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힘으로 작용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시대를 막론하고 지배층은 노동자나 농민의 고단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그림을 경멸해 왔다.
우리는 어떤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미술이나 문학은 노동자나 농민, 빈민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가?
작가 자신의 내면에만 갇혀서, 혹은 우아하고 세련된 문체를 구사하는 테크닉에 갇혀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 건 아닐까?
노동이 아름다울 수는 없는가 - 마르크스의 <자본론>
인류가 이룩한 과학기술 수준이나 생산력을 고려하면 이 지구는 전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땅덩어리와 자원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국가 간 극심한 빈부격차와 각 국가 내에서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양극화이다.
아무리 냉정한 시장경제라 하더라도 정상적으로 경쟁할 능력이 없거나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람을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하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빌 게이츠 왈 "인간의 위대한 진보는 발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어떻게 불평등을 줄이느냐에 달려 있다".
<시장의 여인> 박수근
파행적인 한국사와 왜곡된 가족사 - 윤정모 <어머니>
한국 사회에서는 봉건적 가부장제 관계와 의식이 거의 해체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연장되었다.
우리 어머니들은 조선 시대의 유교적인 가부장제 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지독히 권위적인 남편과 꽉 막힌 사회적 통념 속에서 온 생애를 보내야 했다.
여성으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한 채 집 안팎에서 가족을 위한 희생만을 강요받아야 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필자 생각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직도 곳곳의 가정에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또 옛날 사고방식과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많은 나이 든 어른들이 있다.
물론 그 어른들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변하고 있고 변하지 않으면 같이 살 수 없는 시대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므로 가사도 여자만 하는 게 아니라 같이 해야하는 것이고 도와준다는 개념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라는
이 수평적 사고를 뒷받침하여 평등하고 동등하게 남아선호 사상을 중시했던
그 시대의 남녀가 아닌 사람의 객체로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말 나이가 젊다고 해서 꼭 젊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나이가 많다고 해서
꼭 꼰대는 아니더라 라고 요새 느끼고 있다.
5부 일상성의 비밀
여성의 일상과 수직적인 분업 -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마르크스는 가족 내의 분업과 소유관계를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규정한다.
남성이 주로 밖의 일을 담당하고 여성이 출산과 육아, 가사를 담당하는 식의 노동 분업은
남성의 여성과 자식에 대한 소유의 다른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정 내의 분업이 가부장제 가족제도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모계 제적인 요소가 강했던 사회에서 수렵과 채취는 노동에 함께 참여하고 그 결과를 공유했다.
반복과 순환의 일상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
현대 사회에서 국가나 자본과 같은 권력이 만들어 낸 새로운 무기가 바로 일상의 지배이다.
사람들을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사회나 정치 문제, 인간의 내적인 문제에 대해서 망각케 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장치는 없다.
특히 일상의 지배가 개인의 욕구와 연결된 것처럼 여겨지게 될 때 효과의 지속성은 더욱 강력해진다.
일상과 욕구의 연결은 소비사회 속에서 아주 손쉽게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현대인의 삶은 이제 반복과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일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선행 조건들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우선 일상 속에서 살며 일상을 체험할 것,
다음으로 그것을 수락하지 말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당연해 보이던 것에 대한 의아함은 일상을 구체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일상에 매몰되었던 삶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TV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
TV는 정신적인 풍부함이나 예술적인 감흥보다는 인간을 아무 문제의식 없이 소비를 하는 기계로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TV를 통해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갖기보다는 무비판적이고 체계 유지적인 성향을 갖도록 집단적으로 훈련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마르셀 뒤샹 <샘>
의미가 없어 보이던 기존의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소중한 창조 행위일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해석 능력 이것을 예술이라 해석하는 그 자체가 예술이다.
해석이 새로울 수 있다.
6부 개인과 사회 그리고 자아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 -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개인주의가 무조건 이기주의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집단주의라고 해서 모두 이타적인 것도 아니다.
이타적인 집단주의도 있을 수 있지만 이기적인 집단주의도 있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모든 희생이 다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순수하게 우러나오는 자발성에 기초하고 그 행동의 방향이 인류의 공공적인 가치에 부응할 때 우리는 그 개인의 희생에서 숭고함을 본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나타난 그간의 자발적 희생이란 대체적으로 국가나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적인 도덕률이 개인을 강제한 결과인 경우가 많았다.
개인에게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하기 위해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한 인간 사회를 꿈꾸는 것은 헛된 공상일까?
나르시시즘, 개인의 파괴인가 발견인가 -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나르시시즘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는 태도가 일반적이다.
나르시시스트들의 우월감과 자기도취는 일차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한 자기도취가 한편으로는 타인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낳기 일쑤 이기 때문이다.
자기애의 이면에서 타인에 대한 경멸이 자라난다.
언뜻 보기에는 나르시시즘이 자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만큼 자기만의 개성을 고취시킬 것 같지만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진다.
니체는 무엇보다 자신을 완전한 개인으로 만들어야 하고 모든 행위에 있어
개인의 '최고 안녕'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변검술사로 살아가는 현대인
페르소나 '극본 없는 극본'
인간들은 삶의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간다는 뜻
우리 정말로 사회에서 생활할 때와 안에서 생활할 때 인격과 표정이 다른가??
다양한 시대상과 고민을 담은 미술작품으로 하여금 복잡하고 딱딱한 인문학 고전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
우리의 일상에서 접하는 직간접적인 경험에 대한 문제의식의 지평을 사회적 철학적 영역으로 확장한 후
관련된 인문학 고전의 핵심 대목에 접근함
이로써 그 이론적 실천적 의미를 각 주제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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